2010년 09월 12일
고등학교 3학년 때 지리선생님은 영화광이셨다.
수업 내용 중에 어떤 기후나 지형이 나오면
우리들이 보았을만한 영화의 장면을 예로 들면서
영화 중에 이러이러한 장면이 있는데,
비로 그 곳의 모습이 지금 설명하는 기후이고 지형이며,
그래서 사람들의 주거환경이나 생활 방식이 영화에 나오는 그런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셨다.
원래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했지만
그 선생님 덕분에 수업은 항상 재미있었다.
어느 토요일 수업이었다.
선생님께서는 토요일이니 집에 가서 낮에 공부 좀 하고
밤에 TV <주말의 명화>를 꼭 보라고 하셨다.
낮에 공부하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고3 학생들에게 TV를 보라는 선생님의 말은 꽤 신선했다.
선생님이 추천한 영화는 <산타비토리아의 비밀>이었다.
산타빅토리아가 아니라 산타비토리아다.
이탈리아 북부 작은 마을 사람들이
독일군으로부터 지역 특산물인 와인을 지키는 내용인데,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그 날 수업시간에 설명했던 기후, 생활 등을
영화 속 배경을 통해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보다.
그 날 밤, 일부러 시간 맞춰 TV 앞에 앉았다.
산타비토리아의 순박한 주민들을 이끌고 독일군에 맞서려면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이 등장해야 하는데,
시장이라는 사람은 자기 앞가림도 잘 하지 못한다.
안소니퀸.
어리버리하고 어눌한 시장이 바로 안소니퀸이다.
어차피 얼굴로 승부하는 배우가 아닌 만큼
이 영화에서도 그는 모자란듯한 역할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안소니퀸과 마을 사람들은 수많은 와인을 독일군으로부터 어떻게 지켜냈을까?
재미있고,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다.

경북 청도에는 와인터널이 있다.
원래 철도가 지나는 터널이었는데
지금은 꽤 긴 터널 속에 와인을 저장하고,
테이블도 마련해 사람들이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사람들이 꽤 많다.
주변이 감 산지인가?
감을 원료로 만든 와인이 많다.
밖은 찌는듯 더운데 내부는 아주 시원하다.
어차피 쓸모 없어진 기차 터널,
누군가의 아이디어 덕분에 괜찮은 모습으로 살아났다.
TV를 통해 영화를 보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케이블방송이 아닌 지상파방송만 따지면 더욱 그렇다.
DVD도 있고 파일도 널려있으니 TV로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게다가 방송에 맞게 일부 장면이 삭제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아직 나에게 주말 밤 TV영화는 기분 좋은 대상이다.
비록 그것을 실제로 시청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만약 없어진다면 아주 서운할, 그런 대상이다.
어릴 적 추억에 대한 맹목적 끌림 때문만은 아니다.
DVD나 파일처럼 중간에 끊고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는 상황과
지금 시선을 돌리면 지나가버리는 상황이 주는 몰입은 차이가 있다.
몰입한 만큼 재미가 커지는 것이 영화 보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TV를 보는 그 순간,
지금이 황금같은 주말임을 인식하면서 갖게되는 몸과 마음의 편안함,
바로 그 편안함이 <주말의 명화>가 제공하는 중요한 혜택이다.
같은 시간대 다른 방송에서는 <명화극장>이 있었다.
프로그램 타이틀은 다르지만 주말에 방송되는 영화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주말의 명화'와 같은 의미다.
그리고 <주말의 명화>의 시그널 뮤직으로 사용된 <Exodus>,
음악이 시작할 때의 그 강렬했던 기억으로
방송사는 다르지만 이쪽 저쪽 퉁쳐서 <주말의 명화>일 뿐이다.
<산타비토리아의 비밀>
<우리생애 최고의 해>
<나바론요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공포의 보수>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
<대탈주>
<새벽의7인>
<자이언트>
<로마의 휴일>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
<싸이코>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셰인>
<제3의사나이>
<돌아오지 않는 강>
<알라모>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하이눈>
<리오의 사나이>
<내일을 향해 쏴라>
<졸업>
<새벽의 7인>
<불리트>
<빠삐용>
<쉘부르의 우산>
<태양은 가득히>
<암흑가의 두사람>
<쿼바디스>
<클레오파트라>
<7인의 신부>
<카사블랑카>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
<34번가의 기적>
<파비안느>
...
비교적 유명한 영화들이라 극장에서 봤어야 할 법한데
나는 이 영화들을 TV로 보았다.
그것이 꼭 <주말의명화>만은 아니었겠지만
TV로 본 것만은 확실하다.
이들 중 상당 수는 너무 어릴 때 개봉되었으니
극장에서 볼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차피 DVD로 출시되어 있는 것들이고,
요즘 흥행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어 재개봉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주말의 명화>에서라도 한번쯤 편성되어
주말 밤 한가함을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더군다나 요즘은 금요일 밤에 방송되니 더 여유있는 주말 기분일게다.
하지만 시청률에 민감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이런 바램을 충족시켜 줄
감각 떨어지는 방송 편성 담당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쓸모없는 터널은 살아났는데,
<주말의 명화>의 효용성은 점점 떨어져만 간다.
# by 오늘하루 | 2010/09/12 10:11 | 트랙백 | 덧글(3)